선한 사마리아 사람(Good Samaritan)의 마음

토론토 이토비코에 가면 카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가서 선교했던 사역들을 전시해 놓은 “비전 휄로우쉽 카나다 선교사 전시관”이 있습니다. 설립자이신 최선수 장로님은 우연히 토론토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생가를 방문하고 낙후된 조선 땅에 가서 성경번역 등 한국 문학을 서방에 소개하고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것에 감동을 받아, 이후 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오지 같은 한국 땅을 위해 학교, 병원, 고아원등을 세워 오늘의 한국을 세우는 근간을 이루었음을 깨닫고 이런 귀한 선교사들에 대해 무관심했음을 자책하고 자신의 사재를 들여 ‘내한 캐나다 선교사 전시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번 그 ‘비전 휄로우십’에서 제작한 내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소개한 동영상을 보며 저도 많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그 당시 정말 낯설고 물설은 오지의 땅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고 순교하신 것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질문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카나다 땅에서 일평생을 편하고 즐기면서 살 수도 있었는데, 왜 그런 고난을 스스로 자초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Good Samaritan)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주님의 말씀을 행동하고 실천하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과거의 조선 땅처럼 오늘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은혜 받음을 도로 다시 나눔을 갖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여러 나라들이 있지만 오늘 우리 교회가 추진하고자 하는 “니카라과” 땅을 위해 기도와 물질의 헌신의 마음을 기대해 봅니다.

정녕 몰랐습니다

정녕 몰랐습니다.

내 어머니에게도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도 젊은 시절 큰 꿈이 있었다는 것을.

정녕 몰랐습니다.

어머니에게도 지치고 힘든 때가 있어 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걸.

정녕 몰랐습니다.

아버지도 남들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소시민적 욕망이 있었음을.

정녕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영웅이 결코 아니며 어머니는 만능이 아니란 사실을 달리면 지치고, 칼에 베이면 피나고, 슬프면 울음 운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습니다. 경운기에 치인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도 자식 등록금 때문에 아프지 않다며 마른기침 쏟으시던 아버지의 말이 거짓인 줄을.

정녕 몰랐습니다. 자장면을 한 그릇 시켜놓고 단무지만 집어 먹으면서도 금방 먹어 배부르다는 어머니의 말이 거짓인 줄을.

더운 생선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시며 잔치 집에서 많이 먹고 왔다는 어머니의 말이 새빨간 거짓인 줄을.

정녕 몰랐습니다. 자식 놈은 남에게 뒤질세라 최고 좋은 것을 해주면서도 당신은 시장에서 값싼 옷 한 벌 살 때도 벌벌 떤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습니다. 곁길로 나가는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깊은 밤, 홀로 울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아이의 부모가 되고서야 비로소 이런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습니다. / 시: 정학진

어린이주일과 영적 대물림

한국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날입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날을 처음 제정해서 기념했던 때가 1923년이므로 올 해로 어린이날은 96살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북미주에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은 있어도 어린이날은 없습니다. 물론 미주의 한인교회들은 대부분 5월 첫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지키고 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일이나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언뜻 어린이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이 나라에서 어린이날이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절대 어린이를 차에나 집에 혼자 남겨두어서는 안 되며, 스쿨버스에서 어린이들이 타고 내리는 동안에는 다른 운전자들은 반드시 멈춰서야 하며, 이를 위반했을 때에는 벌금이 어머 어마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나라가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나라에는 다른 나라들에도 다 있는 어린이날이 없는 것일까요?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북미주는 어린이 때부터 자유와 독립심을 중시하기 때문에 굳이 어린이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나 어른들이 평소에 어린이들에게 자유정신과 독립심을 교육하며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나라이기 때문에 굳이 어린이들을 위하여 특별한 한 날을 정하여 그들에게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때 교회마다 어린이들로 넘쳤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교회마다 다음세대가 줄어져가고 있고, 아예 교회의 50%가 주일학교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먼저 부모세대가 그만큼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고 영적관심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사실 1주일에 한 시간으로 아이들의 영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만큼 이젠 가정의 영적 책임이 더욱 중요한 시대입니다. 부모의 세대들이 영적으로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받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해 봅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의 Easter는 'Eastre' 라는 이교도적인 이름을 고대 영어에 맞추어 바꾼 말이다. 이는 튜튼족의 신 중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이었다. 이 여신의 축제는 해마다 춘분에 열렸다.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히브리말인 파스카(Pascha)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윌절, 즉 죽음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했다. Easter가 일반적인 명칭이 되기 전에는 이날이 '주님의 부활절' 및 '부활의 유윌절(Paschal Day of the Resurrection)'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 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 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 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滿月)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절이 항상 축일 중의 축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는 것이다.

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의 Easter는 'Eastre' 라는 이교도적인 이름을 고대 영어에 맞추어 바꾼 말이다. 이는 튜튼족의 신 중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이었다. 이 여신의 축제는 해마다 춘분에 열렸다.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히브리말인 파스카(Pascha)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윌절, 즉 죽음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했다. Easter가 일반적인 명칭이 되기 전에는 이날이 '주님의 부활절' 및 '부활의 유윌절(Paschal Day of the Resurrection)'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 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 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 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滿月)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절이 항상 축일 중의 축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는 것이다.

왜 십자가입니까?

매년 돌아오는 고난주간은 우리에게 이 십자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첫 번째로 옛사람인 나를 죽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냥 사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예수님 혼자 죽으면 안 됩니다. 나도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 멋대로 살고자 하는 내 옛 사람이 함께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를 다녀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예수님이 혼자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으셨습니까? 나를 위해 죽으시고 아니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내 안에 예수가 살기 위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두 번째로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더 이상 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알려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다시 일어날 힘을 가지게 됩니다. 내 가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니카라과 선교교회 건립 및 선교비전센터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난 36년간 우리 염광교회를 통하여 많은 선교사역들을 감당하게 해 오셨습니다. 특별히 러시아와 알바니아 선교회가 구성이 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러시아 쌩떼스부르크의 가나안 신학교와 알바니아를 선교해 왔습니다. 그 이후 우리 북미주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중남미 선교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이 되어, 청소년 청년들을 중심으로 멕시코, 니카라과, 아이티 등에 선교를 지속적으로 하여 왔지만, 중미의 국가 중에서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메인(main) 선교거점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중미의 가장 빈국인 아이티에 권사님들 중심으로 방문하고 선교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우리 교회의 선교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이 되어, 다른 중미국가를 알아보고 기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니카라과를 2018년엔 권사찬양대 중심으로, 2019년엔 적은 인원이었지만, ‘니카라과 전도대회’에 참여하고 많은 은혜를 받고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니카라과를 선교거점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첫째, 니카라과가 개신교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앞으로 중남미의 선교허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것이고, 둘째, 그들의 종교성이 기독교를 쉽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것이며, 셋째, 아직은 적은 금액으로도 큰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실제 100여명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짓는 데에 1-2만불 정도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짓느냐에 좀 다르겠지만) 더운 지역이라 히팅은 필요 없고 천장과 벽만 있으면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을 지을 수 있는 경제적 형편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캐나다와 멀지않은 지역(직항 5시간/경유 7시간)으로 접근성이 용이하며, 다섯째로 겨울엔 시니어들이, 여름 방학 때는 우리 청소년들이 사역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프로젝트들은 앞으로 우리가 기도하며 좋은 사역들을 위해 준비하며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길 다 같이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선교를 한다는 것

한때 한국교회들과 교우들이 선교에 목숨(?) 걸 듯 열심히 선교를 강조하며 선교에 힘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교회도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계 방방곡곡에 우리 한국 선교사들이 가 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최근엔 이 열기가 좀 식어버렸습니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선교사들에게 실망을 갖게 된 어떤 일들로 인해 선교에 대한 반감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일부의 일탈(?)된 선교사들에 의해 정말 오지에서 말없이 수고하는 진짜 선교사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최근엔 이 선교사라는 이름이 너무나 쉽게 남용되다 보니 아무나 다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물론 선교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단기로 몇일 다녀오는 사람들도 교회에서는 “단기선교사‘라고 불러줍니다. 그래서 아예 어떤 분은 몇 달 선교지에 다녀왔는데, 자긴 선교사라고 하면서 아예 교회의 직분보다는 자신을 ’선교사‘라고 부르라는 분들까지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그게 집사보다는 더 높아 보이는가(?) 봅니다.

한국의 장로교(통합)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선, 신학공부(M.div)를 다 마치고 반드시 1년간 선교훈련을 따로 받아 파송을 합니다만, 선교지에 가보면 선교사라고 하는데, 정말 제대로 된 선교사인가 의심이 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일부의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성도들이 실망을 하고 심지어 피해(?)를 보고, 선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면서, 이젠 그가 진짜 선교사인가를 테스트하는 일들까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이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부정적인 일면만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자신의 삶의 평생을 오지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선교는 선교지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보고 거기서 평생 있으라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부만 보고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접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이오처럼 정말 선교사님들을 존경하고 잘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후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대신에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땅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내 한 평생에 선교지에 우리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꿈을 가졌으면 합니다. 선교사님을 믿고 우리가 그 일에 모두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함께 힘썼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하나님의 꿈은 무엇일까요? 사실 인간이 꿈을 꾸지, 하나님이 꿈을 꾸실까요? 그러나 그 꿈을 소원이라고 바꿔 말해본다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하나님에게 소원이 있다는 것도 말이 될까요? 사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만유의 주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그 분에게 소원이 있다는 것은 모순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즉,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도 소원이 있고, 바라시는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소원과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자기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딤전 2장 4절“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민족, 특정한 계층,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 곧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의 큰 꿈, 바로 그 그림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흰옷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께 찬양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시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신 구속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인간으로 보내시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역사입니다. 선교가 없으면 개개인의 실제적 구원도 없습니다. 십자가 구원은 이미 완성됐지만, 선교는 종말의 날까지 남은 과업으로 우리 앞에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곧 하나님의 꿈이요 소원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아는 철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이 기쁨으로 감당할 사역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하나님의 꿈과 소원과 그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요?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습니까? 그 생각은 과연 누가 주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소원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 모든 염광의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합쳐 함께 힘차게 세워 나가게 되길 소원해봅니다.

니카라과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토론토, 메릴렌드, 시카고, 로드아일랜드, 뉴저지, 뉴욕에서 참여한 83명의 단기팀과 15가정의 니카라과 선교사들이 함께 섬긴 2019 니카라과 전도대회를 마친 소감은 “우리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입니다.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니카라과 사태로 인하여 가장 아픔을 당한 마사야주와 까라소주에서 거행된 이번 전도대회는 첫날인 22일 까라소주에서 10,000명 회집에 317명이, 둘째 날인 마사야주에서 11,000여명 회집에 248명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지난 2008년부터 니카라과 전도대회를 시작으로 이번 대회까지 모두 10번의 전도대회를 주최한 해외한인장로회(KPCA) 뉴욕노회의 선교 열정에 더하여 지난해 출범한 니카라과 복음화 선교회(Nicaragua para Cristo Mission-NPCM) 주관으로 거행된 2019 니카라과 전도대회는 마사야 주(州), 까라소 주(州)를 향하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대회였습니다. 개 교회들을 넘어서서 모두 8개조로 편성된 단기팀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One Team으로 교사강습회, 개인전도, 중보기도, 치과사역, 침술사역, 안경사역, 미용사역, 네일사역, 어린이사역등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자는 작은 몸짓들이었습니다. 개별 사역을 마치고 저녁에 이어진 전도대회장 입구에 선 전도팀들은 물밀듯 밀려오는 참가자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감동이 이어졌습니다.

전도대회 마지막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는 시간에 함께 뜨거운 영접 기도와 함께 저들의 삶을 축복하는 단기팀과 선교사들의 중보기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번 전도대회에도 이틀 동안 아무런 사고없이 대회를 마칠 수 있었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년 전도대회를 기다리는 니카라과 현지인들과 돌아가서 열심히 1년간 준비해서 내년에도 무조건 참가하겠다는 다짐들이 단기팀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니카라과에 여전히 우리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19 니카라과 전도대회를 통하여 니카라과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한 자락이나마 대하는 은혜와 축복을 함께 누렸습니다. “Nicaragua para Cristo” (니카라과를 그리스도께로!)

 

주후 2019년 2월 25일 니카라과에서 이동홍선교사 드림

“3.1절과 기독인”

    “3.1절과 기독인”  

2019년 3월 3일, 이요환 목사 

 올해는 1919년 기미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고국을 떠나 이민생활을 하며, 종종 삼일절 기념주일예배를 드리며 조국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3.1운동은 나라와 주권과 2천만 동포의 생명과 우리의 역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었습니다. 계층, 지역, 종교, 나이를 뛰어 넘어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9년 만에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언된 ‘독립선언서’를 외치며 삼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계 지도자가 16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약 20만명(총 인구의 1.3%)에 불과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역할이었습니다. 서슬이 퍼런 일본 경찰과 군부를 향하여 ‘죽으면 죽으리라’의 일사각오를 갖고, 조국 해방을 위해 항거할 수 있는 것은 ‘부활신앙’만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삼일 만세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짓처럼 보이고, 고난을 자초하는 일이며, 나아가 죽음까지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뒤에 오는 주님의 평강을 소원하며 민족의 자결과 독립을 외치는 삼일 만세 운동에 온 교회가 적극 가담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주동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신앙의 선배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한민국 조국이 되길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조국을 위해 더욱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